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랑코 바레시 (문단 편집) === 클럽 경력 === 유스 시절, 선수 시절 전부 밀란만을 위해 헌신했으며 2번의 강등에도 불구하고 팀을 지탱했으며,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구단주 취임 후 [[아리고 사키]] 시절 [[오렌지 삼총사]]를 비롯한 [[파올로 말디니]],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 [[마우로 타소티]], [[알베리고 에바니]], [[로베르토 도나도니]], [[카를로 안첼로티]], [[데메트리오 알베르티니]]등과 함께 역대 최강의 팀으로 꼽히는 '''[[밀란 제너레이션]]'''을 구축하고 팀의 주장으로 전세계를 호령하였다. 14살 때이던 1974년, 형인 [[주세페 바레시]][* 주세페 바레시는 최근까지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인테르]]에서 수석코치를 맡고 있다.]를 따라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인테르]]에서 입단테스트를 하지만 키가 작아 입단 테스트에서 떨어지게 되고, [[AC 밀란]]에서 전설인 [[조반니 트라파토니]][* 선수 시절 은퇴시즌을 제외한 전 시즌을 밀란에서만 뛴 밀란의 전설. 은퇴후 72~74년까지 밀란 유스팀 감독을 맡다 74년, 75-76 시즌때는 밀란 A팀의 감독을 맡기도 하였다. 그러나 막상 감독으로 전성기를 맞은 팀은 라이벌 [[유벤투스 FC|유벤투스]](...). 그리고 그 [[유벤투스 FC|유벤투스]]는 [[조반니 트라파토니]] 시절 국내 무대와 유럽 무대에서 깡패짓을 하면서 황금기를 구가하였다.], [[잔니 리베라]] 앞에서 플레이를 펼쳐보이고, 150만 리라+'''키가 1cm 자랄 시 100만 리라 추가''' 라는 해괴망측한 계약을 체결하고 AC 밀란 유스팀에 입단한다.[* 당시 키는 164cm였으며 후에 176cm까지 자란다.] 그 후 밀란의 전설인 스웨덴 삼총사 중 한명인 [[닐스 리드홀름]]의 지도하에 기량이 급성장하고, 1977년 18세의 나이로 세리에 A에 데뷔하고, 곧바로 천부적인 재능과 실력으로 주전을 차지하고, 78-79 시즌 [[스쿠데토]]를 들어올리는데 커다란 공헌을 한다. 하지만... 당시 밀란 구단주인 [[펠리체 콜롬보]]가 [[SS 라치오]]와의 경기에서 [[승부조작]]을 했다가 발각되었고, 팀은 [[세리에 B]]로 강등당하게 됨으로써 주전 선수들이 타팀으로 이적하지만 바레시는 에바니, 타소티등과 남아 팀을 지키면서 [[세리에 A]] 승격을 이끌지만, 승부조작의 여파로 선수들은 계속 떠나고, 팬들도 등을 지면서 이듬해 재차 [[세리에 B]]로 강등되고 만다. 바레시를 눈여겨 보고있던 [[UC 삼프도리아]]와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인테르]]가 바레시를 영입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는 모든 조건을 뿌리치고 팀에 남아 다시금 세리에 B 우승을 차지하며 팀을 세리에 A로 복귀시킨다. 이 때의 모습을 본 팬들의 절대적인 지지속에서 바레시는 20대 초반의 나이로 상처입은 명문팀의 주장이 된다. 한편 이런 바레시와 달리 '밀란 역사상 최고의 배신자'로 꼽히는 선수가 있었으니 다름아닌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1982년 스페인 월드컵]] 우승멤버 [[풀비오 콜로바티]]. 원래 AC밀란 유스 출신으로 바레시와 함께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밀란의 주장 완장까지 차기도 했다. 그러나 80년대 초반 밀란의 2차례의 강등때 첫 강등때는 남아서 밀란을 다시 세리에A로 올려놓는데 공헌했지만 두번째 강등때는 팀을 떠나게 되는데 그것도 라이벌인 인터 밀란으로 이적해버리고 만다, 이때문에 같은 유스 출신이면서도 두번째의 강등마저 견뎌내고 팀을 지킨 바레시와 대조되어 '밀란 역사상 최고의 배신자'라는 평가를 받는 선수이다. 다만 시즌도중 밀란의 부진에 화가난 관중들이 던진 돌덩이에 머리를 강타당하는 사건이 있었던등 그가 이미 밀란에서 마음이 떠날만한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에, 밀란팬이면서도 그에게 동정적인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다. 팀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바레시에게 하늘이 축복을 내렸는지 1986년 당시 신흥 언론 재벌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중위권 팀이 되어버린 몰락한 명문 AC 밀란을 매입하면서 막대한 자금을 풀기 시작하면서 다시금 강호로 떠오른 밀란은 유럽을 다시금 정복하기 위해 분투하지만 코파 이탈리아에서 [[아리고 사키]]가 이끄는 2부리그 팀인 [[파르마 칼초 1913]]에게 개박살 나면서 자존심을 구겼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베를루스코니는 사키의 철학에 매료되어 당시 밀란 감독이자 전설인 [[닐스 리드홀름]]을 경질하면서 까지 사키를 감독으로 임명하였고, 이듬해 [[마르코 판바스턴]], [[카를로 안첼로티]], [[루드 굴리트]], [[로베르토 도나도니]]등을 폭풍영입하면서 스쿼드를 보강하였고, 사키는 바로 리그 우승으로 화답하면서 바레시는 9년 만에 [[스쿠데토]]를 들어올리고, 기세를 몰아 89, 90년 [[UEFA 챔피언스 리그|유러피언컵]]를 2연패하면서 유럽을 지배한다. 사키가 떠난 이후에도 밀란의 파죽지세는 계속 되었고, [[파비오 카펠로]] 부임 이후 90/91 시즌 34라운드부터[* 엄밀하게는 이때는 아직 [[아리고 사키]]가 감독할 시절이다.] 92-93 시즌 23라운드까지 세리에 A 58경기 연속 무패기록을 세우지만 90년 챔스 이후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계속된 불운으로 우승컵을 놓치고[* 1990-91시즌에 챔스 8강전에서 마르세유와 경기를 치뤘는데 경기 도중 조명이 꺼져서 경기가 잠시 중단되고 조명이 고쳐졌지만 밀란이 재경기를 요구하면서 땡깡을 피우다 UEFA에서 몰수패를 선언하고 1991-92시즌 유럽대항전 참가 금지를 당하고 만다 그리고 1992-93 시즌 챔스 결승전에서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에게 0-1로 패하였다. 이때 우승팀인 마르세유는 [[리그 1|리그앙]] 에서 [[승부조작]]을 시도했다가 우승 박탈등의 중징계를 받았지만 [[UEFA 챔피언스 리그]]는 승부조작과는 무관하기에 우승컵은 그대로 들고 있다.] 결국 1994년 세계 최강팀 중 하나라 꼽히는 [[FC 바르셀로나]] 드림팀 1기를 상대로 4:0 승리를 거둠으로써 4년 만에 챔스 우승을 거둔다. 이후에 [[밀란 제너레이션]]은 해체 수순을 밟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밀란은 상당히 과도기적인 방황을 지속하게 된다. 그 시절에 당한 참패가 바로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산시로]]에서 유벤투스에게 6:1로 처참하게 털렸을 때이다. 바레시 역시도 인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경기라고 말할 정도였던 이 대참사에서 바레시는 슬슬 유망주 티를 벗어나 전성기를 향해 달리고 있는 [[크리스티안 비에리]]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털리고 말았다. 그 경기 이후 바레시는 슬슬 은퇴를 결심하게 되고 96-97 시즌이 끝나고 현역 은퇴를 선언한다. 많은 밀라니스타들이 그의 은퇴를 슬퍼하고 기념해주었다. 그가 밀란에서 달았던 등번호 6번은 당연히 [[영구결번/스포츠|영구 결번]]이 선언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